토론, 댓거리 문화에 대해서

댓거리는 토론이라는 순수 우리말 이라고 한다. 대학가에서 토론을 순 우리말로 표현할때 그렇게 표현하고는 한다. 대학가에서 댓거리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차치하고.. 더이상 토론문화를 찾기 쉽지 않다. 더이상 사람들은 토론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해서.

그 사회에서 건전하고 합리적인, 성숙한 정치,사회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토론문화의 정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문화가 없기때문에 정치인들이 그냥 몸싸움이나하고.. 수준미달의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원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은 설득에 의한 동의로 바뀔 수는 있어도 강제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강제에 의해 하루아침에 버릴 수 있는 이념이나 신념이었다면, 그것들은 이미 이념도 신념도 아니었고 다만 허위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이 나와 다르다고 강제하여 전향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다만 인간성에 대한 몰이해이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이념이나 신념에 대한 모독이 될 뿐이니다. 당신의 이념과 신념이 당신에게 귀중한 것이라면 남의 그것들도 그에게는 똑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당신의 그것들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남의 그것들도 존중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요구이며 인간 이성의 당연한 주장입니다.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강요하거나 강제하는 대신 토론합니다. 아주 열심히 토론합니다. 그러다 벽에 부딪히면 “그에겐 안된 일이지만 할 수 없군(tant pis pour lui)!” 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섭니다. 강제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치고받고 싸우지도 않습니다. 또 미워하지도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처 넣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습니다.

이 글은 홍세화 씨의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에서 인용한 글이다. 

얼마전에 MBC에서 하는 100분토론 “한미 FTA, 약인가 독인가 Ⅱ”를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잘 된 시사토론 프로그램이 아닌가 한다. 거기에서 언제나 돋보이는 사회자 손석희와 함께하는 토론은 언제나 치열하고, 또 즐겁다. 대부분의 이 100분 토론에서 승자도, 패자도, 승복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면 왜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일까? 한쪽이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서로를 조금씩이나마 이해하는 과정에서 토론이 필요하다. 그들은 토론이 끝났을때, ‘피상적인 적’ 에서 저쪽의견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것이다.

지난 토요일에 다함께 에서 하는 2006 “전쟁과 평화의 시대” 에 갔다왔다. 일반적인 세미나.. 즉, 단방향 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었다. 하지만 가보니 ‘포럼’ 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있었다. 언젠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포럼과, 세미나, 컨퍼런스.. 뭐 그런것들의 차이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2/3 는 발제자가 발제를 하고.. 1/3은 아무나 나가서 자유토론을 한다.. 그리고 마무리는 발제자가 정리발언을 하는 식이다. 단방향 커뮤티케이션을 예상하고 갔던 나에게 꽤 의미있는 놀라움 이었다. 아주 잘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꽤 무난한 자유토론이 진행되었다.

모든 토론의 결론은.. 홍세화씨가 말하듯 “그에겐 안된 일이지만 할 수 없군” 일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듯, 정치적 성향같은 것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토론은 오직 다른 사람을 완전히 설득시켜서 바꾸기 위해서만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충분한 이유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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