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비상계엄 선포 이후 4개월
이번에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일련의 민주주의 유린 사건을 보통 미디어에서는 ‘쿠데타’ 보다는 조금 더 거부감이 덜한 ‘내란’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나는 ‘쿠데타’라는 단어가 이번 사건의 본질을 더 명확하게 전달해준다고 생각한다. 쿠데타 중에서도 이번과 같이 이미 권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으로 스스로 벌이는 쿠데타를 가리켜 “친위 쿠데타”라고 부른다고 한다. 쿠데타라는 용어는 알지만 2024년의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는 단어라고 생각했고 그중 “친위 쿠데타”도 역사 속에서만 있었던 사건이기에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 내 블로그에 2025년에는 제헌절을 휴일로! 을 쓰면서 처음 찾아보게 되었다.
2024년 12월 3월 계엄 선포 이후 벌써 4개월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은 다시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대통령도 내란죄에 대해서는 체포될 수 있기 때문에 체포영장이 발부되었고, 여러 번의 체포시도들 거쳐서 힘들게 체포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단 풀려났다. 이 힘들었던 과정에서 사람들이 확인한 것은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그리고 법치를 수호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4개월 동안 수많은 사건이 있었고, 국회 본회의 현안질의, 국방위 행정안정위를 비롯한 국회 위원회 현안질의, 헌법재판소 재판과정 등을 통해 실체를 파악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또 영상과 기사로 공유되면서 쿠데타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갔다. 2025년 4월, 헌재 판결은 대통령 파면으로 결론이 났지만, 아직도 수많은 재판과 이에따른 논란을 남겨두고 있고 무엇보다 사회적 분열과 이를 해소까지 길고긴 고민이 남아있다.
4개월 동안, 친위 쿠데타라는 사건은, 평소에는 사회이슈에 관심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잠자고 있던 되어있던 “민주주의” 라는 세포들을 끄집어내어 활성화 시켰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던 보수 평론가 김진은 최근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으로 인터뷰 한바 있다. 평소에 좋아하는 평론가는 아니지만, 공감이 되었다.
내 유튜브 댓글을 보면, 탄핵 찬성세력의 결의와 탄핵 반대 세력의 감도가 다르다. 탄핵 찬성의견을 가진 사람은 “평생 데모 안해봤지만 이번엔 나간다”, “내가 목숨을 건다”, “30~50대는 내 아들딸에게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게 하고 싶다.” 와 같이 실존적이고 현실적인에 반해 탄핵 반대세력의 의견은 관념적이다.
직접 모여서 이루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광장에 모여서 민주주의를 해치는 세력을 거부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같이 지키는 동질감을 받고 것이 몸에 새겨지고 퍼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시위에 직접 참여해보고, 이번과 같은 쿠데타 시도를 직접 본 사람이 느끼는 헌법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읽는 헌법의 차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대학교 때까지는 대학가에 노동자 대회나 미군 반대시위가 많았다. 궁극적으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노동법, 국가보안법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기억한다. 나도 선배들을 따라 시위에 참여해보았던 기억이 20대 초의 내가 사회를 피부로 느끼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2016년 박근혜 탄핵도, 거기에 참여한 촛불시위 참여자들도 그랬지만, 더 큰 갈등을 치른 2024년 윤석열 쿠데타는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이 직접, 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민주주의와 헌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탄핵 찬성 집회에서의 20대 여성의 높은 비중
그럼에도 이번처럼 세대 간, 성별 간 차이가 극명하게 표출된 것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세대간의 차이는 살아온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세대 간에 견해 차이가 있기때문에 이해가 되더라도 너무나 큰 차이를 보였다. BBC 기사 ‘탄핵 집회’, 20대 여성 가장 많고 20대 남성은 가장 적었다 이유가… 나 탄핵표결 때 ‘여풍’ 거셌다…여의도엔 20대·광화문엔 70대 에서 잘 설명되어있다. 젊은 여성 비율이 높다는 것은 지표에서 보일뿐 아니라 실제 영상이나 현장의 느낌도 그러했다.

KPOP 노래와 응원봉이 집회에 활용
KPOP과 같이 집회에 거부감을 낮춰주는 장치들은 참 좋은거 같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의 은유적인 가사는 참 집회노래로 좋다고 느꼈다.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같은 깃발 등이 웃음을 주었다.

탄핵 이후에 사회 통합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우리나라같은 양당 체제에서 두 당이 나라의 발전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합리적인 토론을 하고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에 이르기를 바란다. 물론 이상적인 토론과 합의 같은 교과서적인 것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대립은 결과적으로 국가에 손해를 가져올테니 두 당이 모두 적절한 규모를 가지고 적절히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균형이 있어야 서로 감시도 하게 되고 너무 큰 권력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탄핵 결정 이후에 일단 모든 국가의 주요 구성원들이 결정에 동의하는 메시지를 내어서 다행이다. 이번 탄핵과정에서 문제가되는 반인권적인 결정으로 많은 사람을 걱정하게 했던 인권위원회 안창호 위원장도 일단 “헌법재판소의 선고 결과를 모든 국가기관과 국민이 존중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화해와 통합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었다. 지금은 국회 의석수도 한쪽이 압도적이고 정치상황도 보수당에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다. 이는 당연히 여당인 보수당이 국민이 공감하기 힘든 일방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 결과이지만, 어서 극단주의 세력과 결별하고 합리적이고 중도를 어우를 수 있는 세력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서로 견제할 수 있는 균형을 이루어 정치적 균형을 지키며 경쟁해야 우리나라가 좋은 의사결정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리라.
최근에 박원장 기자의 글 비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기고문 을 읽었다. 미국 대선 후보였던 매케인이 대선에 지고나서 깔끔하게 승복했던 것, 그리고 그에 비해 재선에 실패 했을 때 승복하지 않았던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이다. 폭력이 아닌 선거로 권력자를 결정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유시민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처럼 반-민주주의 적인 것이 무엇이 있을까. 윗 글에서 박원장 기자가 인용한 것이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교수(하버드대)는 민주주의는 3가지 원칙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것’, ‘권력 쟁취를 위해 폭력을 쓰지 않는 것’, ‘극단주의 세력과 연대하지 않는 것’. 이 3가지 원칙을 모두 저버렸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크게 흔들렸다.
단시간 내의 통합을 기대하기보다는 더 큰 갈등이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해 위 레비츠키 교수의 3가지 원칙에 공감이 된다.
최장집 교수는 쿠데타 한달 후에 있었던 인터뷰 한국은 유사내전 상태, 대통령 몰락해도 안 풀릴 것 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대통령직의 파면이든 반헌법적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이든 지금 대통령은 몰락이 결정된 상황이다. 이를 마무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이 사라진다고 공존의 정치나 평화의 시민사회가 오는 건 아니다. 지금 같아선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나 유사내전 같은 상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특단의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의의 해결자를 기대할 수도 없다. 한번에 즉각 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차근차근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이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긴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요즘 좋은 글을 많이 쓰시는 김영민 교수는 “한국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가건물에 비유했다. 빨리 지을 수도 있고, 빨리 허물 수도 있기 때문에 공들여 짓지 않는 가건물.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자유, 경제, 문화,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서 필요한 고민을 제때 하면서 왔는가. 쿠데타는 너무 빨리 대충 지어버린 가건물의 부작용이 아닐까.
명확한 사실은 대통령 파면으로 문제 해결이 된 것이 아니고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사회를 물려줄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민중 가요중에 꽃다지의 ‘주문’ 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번 탄핵 집회에도 꽃다지가 직접 라이브로 불렀던 노래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라는 부분이 후렴 부분인데 이번 탄핵 집회에서 직접 들으니 너무나도 좋았다.
우리나라는 87년 항쟁, IMF 등 커다란 위기를 통해 더 강해졌다. 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지금의 헌법이 만들어져서 우리나라 민주화의 기본이 만들어졌고, 1997년 IMF 이후에 있었던 경제 구조조정으로 우리나라가 지금 3만불을 돌파하는 기반이 되었다. 2024년 쿠데타를 극복함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성찰도 다시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에 더 맞는 정치구조로 개편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한” 민주주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번 2024년 12월 쿠데타를 통해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웠다. 좋았던 점은 이번 탄핵 정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집회에 갔을 때 젊은 세대가 아주 많이 보였고, 그에 따라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진화하는 대한민국의 시위-집회 문화, 도구가 눈에 띄었다. 포스트 계엄 세대의 탄생 기고글에서 보이듯이 원칙과 절차를 지키는 모습은 기성세대의 부족했던 부분들도 새로운 민주주의에서는 보완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의 미래의 모습도 기대된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로 유명한 내가 좋아하는 김영민 교수는 2024년 12월 31일 중앙일보 기고 글에서 [쉼 없이 수선해 멋진 유산 물려줘야 진정한 보수](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4059) 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한국 보수 반공 집착 넘어서야
뜬금없는 계엄시도를 통해 공동체의 밥상을 엎은 지금, 한국의 보수 우익에게도 마침내 자살의 기회가 왔다. 어떤 마무리를 할 것인가. 국가폭력의 기억을 가진 한국의 보수 우익은 과연 월트처럼, 핏줄을 넘어, 인종편견을 넘어, 구식 남성성을 넘어, 자신의 후계를 찾을 수 있을까. 반공과 시장에 대한 집착을 넘어 월트처럼 세대를 넘는 가치를 발견하고 전해줄 수 있을까.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을까. 중병에 걸린 자신을 버림으로써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까.
보수는 친위 쿠데타라는 똥볼을 차서 헤매고 있지만, 그들이 헤매고 있다는 것은 진보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 서로 추구하는 바를 이해하고 적절한 균형을 이루면서 토론과 대화를 통해 기나긴 소통을 시작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잘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잘 해야 한다.